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을사늑약, 피할 수 없었던 치욕의 역사? 그 체결 원인을 파헤쳐 봅니다

by 정보 줍는중 2025. 7. 16.

 

"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보호국으로 전락한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온 백성이 피눈물을 흘렸죠.

과연 우리는 왜 이토록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만 했을까요? 단순히 힘이 약해서였을까요? 오늘은 을사늑약이 체결될 수밖에 없었던 복합적인 원인을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을 통해 깊이 있게 들여다보겠습니다.

거대한 야욕의 서막, 일본의 대륙 침략 계획

사실 을사늑약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일본 내에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시아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첫 번째 발판으로 한반도를 주목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의 야욕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맺은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국제 사회, 특히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사실상 승인받게 됩니다. 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암묵적으로 동의해 준 셈입니다. 결국 대한제국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칼날 위에서 진행된 강압적인 조약 체결 과정

국제적 발판을 마련한 일본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습니다.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사로 대한제국에 파견되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단 하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를 수차례 만나 조약 체결을 압박했지만, 고종은 끝까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11월 17일, 무장한 일본군을 동원해 궁궐을 포위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대신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을사늑약 찬반 대신 명단 직책 결과
참정대신 한규설 총리 격 반대
탁지부대신 민영기 재무장관 격 반대
법부대신 이하영 법무장관 격 처음엔 반대했으나, 이후 침묵
학부대신 이완용 교육부장관 격 찬성 (을사오적)
군부대신 이근택 국방부장관 격 찬성 (을사오적)
내부대신 이지용 행정안전부장관 격 찬성 (을사오적)
외부대신 박제순 외교부장관 격 찬성 (을사오적)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산업자원부장관 격 찬성 (을사오적)

 

결국 참정대신 한규설 등 일부 대신들은 끝까지 반대했지만,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 소위 '을사오적'은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여 조약 체결에 찬성하고 맙니다. 이 과정에서 고종 황제의 최종 승인, 즉 옥새 날인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습니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자, 주권 국가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자주성을 잃어버린 슬픈 결과

을사늑약의 핵심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일본인 통감(統監)의 설치였습니다.

  1. 외교권 박탈: 대한제국은 더 이상 독자적으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거나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주권이 사실상 상실되었음을 의미합니다.
  2. 통감부 설치: 서울에 설치된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전반에 간섭하며 실질적인 식민 통치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초대 통감으로는 조약 체결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를 잃었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을사늑약은 왜 '조약'이 아닌 '늑약(勒約)'이라고 부르나요?

A. '늑약'은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입니다. 을사조약은 고종 황제의 최종 승인(비준) 없이 일본의 군사적 위협과 강압 속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정식 조약으로서의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불법성과 강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을사늑약'이라고 부릅니다.

 

Q. 고종 황제는 조약 체결에 정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나요?

A. 아닙니다. 고종 황제는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려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지만 열강의 외면으로 이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교훈

을사늑약은 단순히 힘이 약해 맺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제국주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의 치밀한 계획,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열강들의 암묵적 동의, 그리고 국가의 위기 앞에서 분열하고 무너졌던 일부 위정자들의 책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이 치욕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아마도 굳건한 자주 국방력과 외교력,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 내부의 단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을사늑약이라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입니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 을사오적의 최후는 어땠을까?
  • 헤이그 특사 파견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 을사늑약 이후 일어난 의병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이러한 궁금증들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포스팅에서 더 깊이 다루어 보겠습니다.